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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권뉴스레터16호] 필리핀 민다나오의 전쟁과 평화
이름 관리자 날짜 2012-09-23 조회수 3568

 

민다나오의 전쟁과 평화

2006년 12월, 필자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사실 민다나오와 그 주위 섬들은 서양인 여행자들이 납치되었을 때를 빼고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민다나오는 무슬림 방사 모로족 사람들의 자결권에 얽힌 분쟁으로 3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분쟁의 중심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 분쟁은 120,000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이 희생자들 중 대부분은 일반 시민이었다.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집을 잃고 극빈자가 되었다. 대략 200,000에서 300,000명의 난민들이 이웃 국가인 말레이시아 사바에 망명했으며 다른 이들 또한 안전한 곳을 찾아 마닐라나 필리핀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민다나오의 평화를 요구하며 행진중인 필리핀인들
사친출처: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8&oid=091&aid=0002217327

 

민다나오의 독립 투사들

이 분쟁의 발발은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리핀이라고 불리는 이 군도는 16세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 스페인 사람들은 처음에는 마닐라만 정복했다가 점차적으로 북부의 루존 섬들까지 그 지배를 확장했다. 이후 삼백 년 동안 스페인 사람들은 남쪽으로 이동했고, 격렬한 항쟁에도 부딪혔다: 스페인 통치 기간 동안, 기록된 것만해도 약 200회가 넘는 항거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몇 번의 해안 주둔한 것 외에는 민다나오를 정복하지 못했다. 민다나오의 서부와 인근 섬들은 모로족이라고 알려진 무슬림 술탄 술루와 마긴다나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나머지 섬들에는 선주민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896년, 스페인에게서 독립하려는 필리핀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이는 1898년에 일어난 스페인-미국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필리핀 사람들의 친구임을 자처하며 1898년 12월 선포된 파리원칙에 따라 필리핀을 스페인으로부터 2천만 달러에 “구입”했다. 당시 루존의 필리핀 사람들이 일으킨 항쟁은 600,000여명의 사망자를 냈고 이는 전체 인구의 6분의 1에 달하는 수였다. 다른 섬들에서도 또한 비슷한 규모의 피해자들이 양산되었다. 정확한 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소 백만(당시 인구 7백만 중)의 필리핀 사람들이 미국의 지배 기간 동안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미국 장군이었던 “제이크” 스미스는 그가 원하는 것에 대해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포로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죽이고 불태우길 바란다; 그대들이 더 죽이고 불태울수록 나는 기쁠 것이다”. 그의 동료 장군인 섀프터도 같은 생각을 보다 철학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말했다: “필리핀 사람들의 반을 죽여서 나머지 반이 지금의 야만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질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렇게 실행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필리핀을 팔 권한이 없었고 미국인들이 구매할 권한이 없다면, 민다나오에 대해서는 더욱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스페인이 민다나오를 정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통치에 대한 필리핀의 항쟁은 몇 년 동안이나 지속되다가 투쟁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버리고 엉클 조와 타협하면서 종결되었다. 민다나오에서의 항쟁은 1914년까지 지속되었다. 미국 통치에 대한 항거는 1906년 3월 2일 Bud Dajo의 첫 전투, 더 정확히는 모로족 분화구 대학살이라고 불린 사건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는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해 검과 창으로 무장한 약 800명에서 1000명의 모로족들이 최신식 무기와 대포에 밀려 졸로섬의 화산 분화구로 후퇴한 사건이다. 전투가 끝났을 때 6명의 모로족만 생존해 있었다. 수백의 미국 군대 중에서는 단 스무 명 정도만 사망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모로족은 공식적으로 독립하는 1946년까지 필리핀 내 미국 식민지 하에서 지냈다. 이들은 그 후에도 계속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차별 받고 억압받았다. 당연히 이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왔고 자유를 갈구해왔으며 이것이 폭동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모로족 훈련병들이 모로족과 역사적 연결점을 가진 말레이시아 사바지역에 침략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후 필리핀 군에 의해 학살된 1968년 자비다 대학살이었다. 무장 투쟁은 1970년대 초반 MNLF(모로족 국가 자유 전선)의 지배 하에서 처음 발생했다. MNLF는 필리핀 정부와 평화조약을 놓고 협상했으며 1996년 ARMM(이슬람교도 민다나오 자치구역)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자치구역은 매우 불합리한 형태의 것으로 밝혀졌다. 두 번째 투쟁은 MNLF의 분리에서 시작되었다- MILF(모로족 이슬람 해방전)-은 무장투쟁을 계속했고 더 큰 자치권을 얻기 위해 협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다나오의 상황은 단순히 자치권, 자기결정권 혹은 필리핀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방사 모로족이라는 수준을 넘어선다. 이것은 민다나오의 여러 문제들 중 하나일 뿐이다. 모로족은 민다나오 전체를 점령한 적이 없고 항상 이슬람교도가 아닌 부족이 통치하는 구역이 존재해왔다. 1918년까지는 이슬람교도가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오늘날 민다나오의 이슬람교도 인구는 25 퍼센트에 불과하다. 선주민인 루마드족이 5 퍼센트를 구성하며 나머지 70퍼센트는 기독교인이다. 이 인구 통계학적 변화는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이는 20세기에 미국인 지배자들과 필리핀 사람들이 민다나오로 필리핀 타 지역민들을 이주시킨 정책의 결과다. 이 결과는 두 개의 장점을 가진다: 새로운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지급함으로써 지역의 불만을 진정시키는 것, 그리고 필리핀 정부에 충성하는 사람들로 민다나오를 채우는 것이 그 것이다.

이 정책은 토지 등록을 시작하고 서구의 법체계를 도입하며 이슬람교도가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규모를 제한함으로 시행되었다.

차기 마닐라 정부의 목표도 명확했다. 그리고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 정착민들과 그 자손들은 모로족보다 사회적 계급이 높지도 못했고 이들과 분리되어 살지도 못했다. 이 이주민들과 자손들은 평범한 일꾼이었고 소작농이었으며 이슬람교도와 어울려 살았다. 어느 누구도 이들을 몰아내려 하지 않았다.

이슬람교도들은 ARMM의 민다나오의 일부 지역과 인근 섬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외의 지역에서도 살고 있다. 루마드 선주민의 열두 부족 또한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모두가 지배했던 지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모로족 사람들의 자치권뿐만 아니라 루마드족의 권리를 위해서도 민다나오 문제에 대한 진보적인 해결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스스로의 역사,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가진 세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 민다나오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1990년대부터 민다나오 섬의 진보세력이 만들어진 이유이며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담은 “세 사람들(tri-people)”이라는 개념의 해결책이 제시된 이유다.

민다나오의 문제를 모로족만의 것으로 축소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민다나오 지역들과 인근의 섬들은 인구의 40%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필리핀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한다. 필리핀의 마지막 보루라고 불리는 민다나오는 오늘날 다국적기업이 천연고무, 코코넛, 망고와 같은 농작물을 착취하고 자원과 산림을 캐내기 위해 열을 올리는 지역이 되었다. 이들은 민다나오의 천연자원을 약탈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파괴하고 조상대대로 내려온 루마드족의 영토를 침범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민다나오의 사회적 문제들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독재에 대항해 필리핀의 공산당(CPP)이 이끄는 신착민 군대(NPA)의 무력반란을 포함한 저항운동의 요새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도시와 시골의 민중 조직이 이끄는 대규모 저항운동도 이끌어 냈다. 마오이스트들의 폭동은 1986년 마르코스 정권이 전복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의 정치적 실패와 자살충동의 연속,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1992년의 공산당 분열은 그 폭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물리적 제거를 지지하며 실행에 옮겼던 필리핀 공산당(CPP) 군사조직(NPA)의 강경세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1992년 분당에서 떨어져 나간 다른 사람들은 민다나오 혁명 노동자당(RPMM)의 핵심 새력이 되었다.

민다나오와 인근의 섬들에는 무기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어디에나 군대와 군대와 다를바가 없는 경찰이 존재한다. 지주들과 채굴 및 벌목을 목적으로 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모두 그들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무장한 용역들을 동원한다. 모로족 저항세력들도 또한 무장하고 있다. 파업을 조직하는 것, 토지개혁을 위해 저항하는 것 혹은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민중들ㅇ르 방어하는 것은 당신이 암살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로요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2001년부터 50명의 기자들을 포함해 수 백명의 활동가들이 살해당했다. 그래서 그 진보 진영의 운동 세력들도 무장을 해야만 했다.

필자는 제4회 민다나오 평화 정상회담에 네덜란드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민다나오를 방문했다. 행사는 민다나오 사람들의 평화운동(Mindanao Peoples’ Peace Movement, MPPM)이 주최했다. MPPM은 1997년과 1999년 사이에 민다나오 섬에 급증한 적대적 행위에 대응하기 위해 발족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2000년 6월,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에 대해 총력전을 선언한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민중들에 의해 타도되었다.

이전의 정상회담은 2000년, 2002년, 2004년에 개최되었다. 전쟁의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일상적인 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것과 동시에 MPPM은 무엇보다도 압후드 시에드 엠 링가 교수가 이끄는 방사 모로족 협의 민중 의회와 함께 방사의 모로족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해결법을 찾기로 결정했다. 방사 모로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것과 유엔의 감독아래 이뤄지는 국민 투표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 두 축이다. 2002년 12월 제2차 정상 회담에서 이러한 국민투표를 위한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제4차 정상 회담은 바실란 섬의 라미탄에서 개최되었다. 그곳이 개최지로 선정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실란과 그 인근의 술루, 그리고 타위타위섬은 이슬람 과격단체인 아부사야프 (Abu Sayyaf Group, ASG) 활동의 중심지였다. 민족 해방운동 노선인 모로민족해방투쟁 (MNLF) 모로이슬람해방투쟁 (MILF)과는 달리, 아부사야프 (ASG)는 폭격, 살인, 납치 등 테러행위에 가담하는 알카에다와 연결된 이슬람 근본주의자 집단이다. 그 집단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부 공작원들이 그 단체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널리 생각된다. 오늘날 이 집단의 활동가들은 조직적으로 불어났다. 정부는 이들을 필리핀 군대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무슬림 감정과 불안을 부채질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으며, 워싱턴의 미국인 조언자”들은 그들이 주창한 “테러에 대한 전쟁”의 최후 타깃으로 그들을 규정했다.

2001년 아부사야프(ASG)의 과격분자들이 지역 병원에서 외국인들을 인질로 잡았을 때, 라미탄은 포위되었고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55%의 기독교인들과 45%의 무슬림이 도시의 인구를 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화롭게 살아간다다. 이러한 현실은 라미탄이 정상회담 장소로 선택된 것에 강한 충격을 받은 정부와 미디어에 반하는 것이다. 회담 참가자들은 그 도시의 사람들과 지방 정부로부터 따뜻하고 친절한 환대를 받았다.

5일간의 정상회담에서 민다나오와 그 인근 섬들에서 온 몇 명을 제외한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민다나오의 분쟁을 어떻게 평화롭고 민주적인 해결책을 구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모로민족해방투쟁(MNLF), 모로이슬람해방투쟁(MILF)의 대표들뿐만 아니라 루마드족도 참가했다. 또한 청년단체나 여성단체, 그리고 평화, 건강, 교육, 경제개발 이슈를 다루는 단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회담은 자기결정권과 분쟁의 평화적 해결방법을 찾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무슬림 여성들이 몇 명의 전통적인 사상을 가진 남자들을 불편하게 만들만한 평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등 다른 문제들도 제기되었다.

그 회담의 한 세션에서는 RPMM과 정부간의 평화협상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휴전 협정은 2005년도에 체결되었고, 이를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모니터링 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는 정상회담 직후에 이뤄졌다. 그러나 여느 무장단체와는 달리, 민다나오노동혁명당(RPMM)은 오직 군사적 관점으로만 사안을 보지는 않는다. 민다나오노동혁명당(RPMM)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건강, 주거, 고용 등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원을 제공하겠다는 정부의 약속 실현 여부를 조건으로 군비축소와 최종합의가 도출된다. 게다가 그것은 그 지역 주민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게 해준다.

민다나오의 평화를 위한 투쟁은 사회 경제적 발전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오늘날 무력분쟁은 많이 줄어들었고, 정부는 모로민족해방투쟁 (MNLF)과 모로이슬람해방투쟁 (MILF), 이 두 양측과 모두 협상 중이다. 아직 분명하진 않지만, 방사 모로족의 자치권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 지는 것은 실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지속적인 평화는 모로족과 루마드족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폭력을 낳는 부당함을 종식시키는 것 또한 의미한다. 민다나오는 잠재적으로 매우 부유한 섬이다. 그러나 그 천연자원은 지금과 같이 부패한 정치인과 지주들 그리고 다국적기업들의 동맹이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이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 :
머레이 스미스, 전 스코틀랜드 사회주의 정당 국제담당, 룩셈부르크의 반자본주의 정당 Dei Lenk 당원

 

출처 :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article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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